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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시절 인연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과     모른 척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하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 한 통 하지 않을 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또 한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사람과     웃으면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 수업 중의 한 구절이다.   며칠 전 거의 2년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가 리버사이드 공원을 산책하자고 전화했다. 친구가 가까운데 살다가 다운타운으로 이사하기 전 우리는 자주 만나 함께 걸었다. 이사 후 만남이 뜸해지고 그녀의 손주가 태어나면서 점점 통화도 줄었다. 내가 연락했지만, 전화 응답기가 꽉 찼다는 신호만 나와서 녹음도 남기지 못하고 만남이 시들해졌다. 우리는 리버사이드 공원을 걷다가 언제 또 만날지 모를 기약 없는 헤어짐이 아쉬워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양로원에 계신 시어머니가 수시로 전화하셔서 전화 응답기가 항상 꽉 차 있어. 시어머니 돌보느라 손주 들여다보느라 바빴어.”     나야 양부모 다 돌아가시고 손주도 없다. 남편도 작업에 매진하느라 휴일도 없이 스튜디오에 간다. 그저 내 한 몸 돌보느라 힘들다며 부담스러운 만남도 피한다.     나이 어릴 때는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결혼해서는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나이 들어서는 손주들과 부모 돌보느라 바빠 연락이 소원해지다 끊긴다.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던 누군가의 말을 실천하는 중이다. 오면 반갑고 가도 굳이 섭섭하지 않다. 오랜 인연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시절 인연에 만족하며 산다.   산책로 강가에 앉기 편한 바위 두 개가 있다. 그 바위 가까이 나무 두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 준다. 나무껍질이 벗겨져 울퉁불퉁 거칠어 보인다. 주름으로 갈라진 거친 내 얼굴과 닮았다. 바위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들여다봤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쉼터로 바위는 내 몸을 편하게 감싸 안듯 받쳐준다. 일 년에 네 번 옷을 갈아입고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며 반기는 자연은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인연 전화 응답기 시절 인연 리버사이드 공원

2024-12-12

[글마당] 따사로운 어느 봄날

‘사람은 사계절은 만나봐야 좀 안다.’고 한다. 사계절 이상을 알고 지낸 사람도 만나지 않으면 멀어지다가 타인이 된다. 줌으로 진행하는 북클럽을 한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새 회원은 잘 모른다. 구 회원들도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의기투합하기 위해 사계절마다 소풍 간다. 맨해튼에 사는 회원들은 조지 워싱턴 다리만 건너가면 뉴저지에 사는 회원의 차로 이동한다. 나는 소풍만은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차 창밖을 내다봤다. ‘겨울이 정말 간 것일까?’ 겁먹은 듯 의심하는 몸짓으로 살짝 삐져나온 새순을 뒤집어쓴 나무들이 무성한 시골길을 죽 올라갔다가 한참을 내려갔다. 멀리 좁아져 사라지는 길을 보며 아득한 애잔함에 빠졌다. 아카시아 냄새 맡으며 시골길을 걷던 어린 시절, 시골집 개울가에서 놀다가 젖은 옷을 말리던 커다란 바위의 따사로움이 떠올랐다. 차가 멈추자 다시 뉴욕의 건물 안에 갇힌 잔인한 암울함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듯 기억의 필름이 끊겼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톨맨 마운틴 주립공원(Tallman Mountain State Park)에 차를 주차했다. 한국 사람 이름이 새겨진 벤치가 서너 개 있었다. 고인이 평소에 즐겨 찾던 곳에 기부한 것이다. 구글링했다. 센트럴 파크 벤치는 1만 달러 기부로 채택될 수 있다. 리버사이드 공원은 7천500달러다. 기부한 의자에 앉아 절벽 아래 강을 내려다보다가 “우리 햇볕 받아 따뜻해진 의자에 등을 기댈 수 있는 봄이 오면 만나자.”라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못된 버릇이 있다. 고치려고도 하지 않고 평생 함께한 버릇이다. 친구, 자매, 아이들 남편에게까지 아주 급하지 않으면 전화하지 않는 버릇이다. 전화가 걸려 오면 상냥하게는 받는다. ‘왜 내가 이렇게 반가운 사람을 잊고 살았지?’ 깨닫고 만나고 싶어질 정도다. 그런 내 불통화 버릇 때문에 사람들에게 핀잔받는다. ‘연락하지 않는 게 자랑이냐? 잘 놀다가도 헤어지면 감감무소식이냐?’ 자주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부정적 특징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내며 섭섭하다고들 한다.     칼바람을 휘두르며 협박하듯 뺨을 치던 겨울이 힘에 겨웠는지 따사로움에 외투를 벗어 던지고 가버렸다. 봄이 약속처럼 찾아왔다. 큰맘 먹고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녀가 감질나는 말, ‘따뜻해진 벤치에 등을 기대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만나자고 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버사이드 공원, ‘매기 스미스’(Maggie Smith)라고, 쓰인 벤치에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기다렸다. 따스하다. 어릴 적 엄마 침대에 들어가 엄마 냄새를 맡으며 느꼈던 그 따뜻함이다.     “잘 지냈어? 네 얼굴 한번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어? 집안에 뭔 일 있는 건 아니지? 생전 전화 한번 하지 않는 네 전화 받고 놀랐잖아.”   “햇빛 받아 따뜻해진 벤치에 등을 기댈 수는 봄날에는 만나자. 고 네가 한 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 이수임 화가·맨해튼글마당 봄날 생전 전화 리버사이드 공원 불통화 버릇

2024-04-19

[글마당] 트레이더 조 김밥

올여름, 선탠하지 못한 내 머릿속에서는 무언가가 터질 것 같았다. 대신 남미 음악에 맞춰 살사, 차차, 룸바, 삼바, 쿰비아, 자이브를 추며 보냈다. 배가 쏙 들어갔다. 깃털 떠돌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걷는다.     노동절 때는 항상 그랬던가? 80도 밑을 기웃거리던 날씨가 갑자기 90도를 웃도는 날이 닷새나 계속되었다. 하나님이 일광욕하고 싶은 내 심정을 알아차리셨나 보다. 트레이더 조(Trader Joe‘s) 신상품인 김밥을 챙겨 파이어 아일랜드(Fire Island)로 달렸다.     지난 8월 7일에 처음 ’조가네 김밥‘이 트레이드 조에 등장했다. 8월 8일에 트레이드 조에 갔다. 잡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 김밥(Kimbap)이라고 쓰인 글자를 보고 놀랐다. 가격 또한 한인 마켓의 반으로 3불 99센트다. 횡재를 맞은 듯 기뻤다. 딱 두 개 남아 있었다. 맛이 좋다. 양도 많다. 가격도 좋다. 조금만 덜 달면 더 맛있겠지만, 가격에 비해 월등하다.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거의 일주일간 매일 맨해튼 93가와 콜럼버스 애비뉴에 있는 트레이드 조에 출근했다. 갈 때마다 ’조가네 김밥‘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겨우 건진 것이 12개다. 10월 25일에 다시 입고할 예정이란다. 먹고 싶은 것을 꾹 누르고 냉동고 문을 열고 김밥이 잘 있나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를 반복하다가 파이어 아일랜드에 가지고 간 것이다. 꽁꽁 언 것을 점심때쯤 먹었다. 데워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     갑자기 더워진 노동절 닷새를 내리 선탠 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김밥도 날짜에 맞춰 5개가 남아 있었다. 그 먼 파이어 아일랜드를 매일 갈 수 없었다. 집 앞 리버사이드 공원에 누워 일광욕했다. 천국이 따로 없다. 날씨는 좋지요. 김밥은 꿀맛이지요. 이런 좋은 날은 마음껏 즐겨야 한다. 즐기지 못하는 것은 죄다. 지난 4월 적도에서 태운 몸이 점점 하얘지다가 다시 검게 그을렸다. 김밥 반 만 먹고 리버사이드 공원으로 5일 동안 출근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남은 반을 먹는 즐거움이란!     찬란했던 여름이 서서히 막을 내리며 멀어져 간다. 올여름이 가져다준 소소한 행복에 감사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트레이더 김밥 김밥도 날짜 파이어 아일랜드 리버사이드 공원

2023-09-22

[글마당] 나일 수도 있다

리버사이드 공원을 따라 콜롬비아 대학까지 걸어 올라가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내려온다. 대학생들의 젊고 발랄함을 느끼고 싶어서다. 힘든 학업에 시달린 피곤한 모습이긴 해도 싱싱하다.     “아버지 여기는 너무 애들이 많아요. 다른 데로 가요.”   내가 젊은 사람들 모이는 곳을 즐겨 찾는 친정아버지에게 말하면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 싱싱한 에너지를 받아야지. 들어가 차 한잔 마시고 잠깐 앉아 있다가 나오자.”   친정아버지는 비원의 한적한 뜰도 즐겨 가셨지만, 나이 든 사람이 많은 곳엔 가기를 꺼리셨다. 나도 그런 연유에서인지 대학가를 거닐면 젊어진 듯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콜롬비아 대학가를 지나 다운타운 쪽으로 걷다 보면 빈 가게가 눈에 띄게 하나둘씩 늘어난다. 팬데믹으로 온라인 쇼핑이 성행하자 급격하게 늘었다. 빈 가게 숫자가 얼마나 늘어났나를 하나둘 세면서 남의 일이 아닌 듯 씁쓸한 심정으로 힘 빠진 다리를 옮긴다. 빈 가게 앞, 바람에 날려 쌓인 너저분해진 귀퉁이에 홈리스가 적선하라며 앉아있다.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는 요즈음 그들도 예전만큼 수입이 없겠다. 내 주머니 역시 현찰도 없고 동전 만져 본지가 한참 됐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 여자가 말한 ‘It could be me.’ (나일 수도 있다)가 생각났다. 그녀는 배에서 서브하는 사람들에게 무척 친절했다. 팁도 많이 챙겨주며 말했다.     “내가 만약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남편에게 얻어터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친정이 가난해서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남자와는 결혼하기 힘들었거든요, 다행히 기회의 나라 미국에 와서 온갖 고생 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이렇게 여행하며 삶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나도 어디에서 어떤 험한 일을 하고 있겠지요. 힘든 일하는 사람들 보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친절하지 않을 수 없어요.”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멈춰진 차 때문에 트래픽으로 열난 남편이 “집에 처박혀 있지 않고 왜 똥차를 끌고 나와서는~.” 길게 말하려다가 멈추고 죄지은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본다.     “우리는 저런 차도 없었잖아. 간신히 마련한 덜덜거리는 차를 타고 가다가 바퀴가 떨어져 나가 저만치 굴러가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 잊었어. 그때 교통사고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남의 일이 아니야. 우리도 저런 상황과 맞닥뜨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요.”   요즈음 굴지의 기업에서 레이오프를 많이 한다. 모아 놓은 돈도 없고 매달 들어오던 월급이 끊겼다. 집에서 놀면 나갈 돈은 더 많아진다. 홈리스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순식간에 일어난다. 남의 일이 아닌 듯 빈 가게를, 홈리스를 그냥 스쳐 지나칠 수가 없다. 하루가 다르게 점점 빈 가게와 홈리스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아직 느끼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상황이 아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확산하면 나에게도 영향이 올 수밖에 없다. 내가 그들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It could be me.’ (나일 수도 있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콜롬비아 대학가 가게 숫자 리버사이드 공원

202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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